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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님의 글에서 -

강영희의 흔적 2012. 5. 16. 09:07

-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내리는 밤에는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 주고 받고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 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할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 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이나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이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중략.....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수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때는 농부처럼 먹을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때는 여왕처럼 품위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보다 우아해 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 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재 모습을 잃지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 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 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데로 차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것이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 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날 또는 다른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유안진, 이향아,  신달자의 수필집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1986